최근 들어 더욱 잦아지고 있는 아시아 선수들의 유럽 진출. 심지어 김민재, 이토 등 힘들다고 느껴진 센터백 포지션의 선수들도 유럽 무대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아시아 선수들에게 불모지인 포지션이 있다. 바로 골키퍼 포지션이다.
그런데 사실 이 골키퍼 포지션에서 이미 두각을 드러낸 아시아 선수가 있다. 주인공은 오만 골키퍼 알 합시.
과거 프리미어리그를 즐겨본 축구팬들이라면 모두가 알 만한 이름이다.
중동에서도 생소하고, 축구로도 잘 안 알려진 오만 국적의 알 하브시가 어떻게 유럽 진출을 이뤄냈을까? 결정적 계기는 재미있게도 한국 덕분이다.
2004 아시안컵 본선에서 대한민국의 맹공을 막아내며 팀의 3-1 승리를 이끌어냈다. 한국에겐 ‘오만 쇼크’로 기억되고 있는 바로 그 경기다.
이때 알 하브시의 활약을 지켜본 노르웨이 스카우트에 의해 FC 린 오슬로로 이적하며 첫 번째 유럽 진출을 이뤄냈다.
이 당시만 해도 그저 운좋게 유럽 진출을 한 것으로 보였고, 후보 골키퍼에 머물 것으로 예상됐지만 놀랍게도 알 하브시는 주전으로 도약하며 노르웨이 리그 최우수 골키퍼까지 선정됐다.
노르웨이 리그에서의 활약을 눈여겨 본 볼턴 원더러스 FC는 2006년에 알리 알 합시를 영입했다. 그러나 주전 골키퍼 유시 야스켈라이넨에게 밀려 어떤 시즌에는 리그는 물론 컵대회에서도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2007-08 시즌, 올리버 칸이 나선 FC 바이에른 뮌헨과의 UEFA 컵 원정 경기에서 2-2로 비기는 데 일조하며 사실상 올리버 칸에 판정승을 거두기도 했다. 시즌 막바지에는 주전 야스켈라이넨이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면서 주전으로 나와 팀의 프리미어리그 잔류에 큰 힘을 보탰다.
그러나 2008-09, 2009-10 시즌에서도 야스켈라이넨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자, 2010-11 시즌에는 위건 애슬레틱 FC로 임대를 갔다. 대부분은 그곳에서도 벤치 신세를 질 것이라 예상했다. 위건에는 리버풀 FC에서 주전으로 뛰었고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경험도 있는 크리스 커클랜드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전 골키퍼 리처드 킹슨과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전 골키퍼 블라디미르 스토이코비치도 결국 커클랜드를 넘지 못하고 팀을 떠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반전이 일어났다. 시즌 초반 당연히 크리스 커클랜드가 주전으로 나섰으나, 블랙풀에게 4-0, 첼시에게 6-0으로 지는 등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다가 커클랜드가 부상으로 빠지게 되었고, 상대는 지난 시즌 위건을 9-1로 패배시켰던 토트넘 홋스퍼 FC였다. 그것도 원정 경기였다. 알리 알 합시는 이 경기에서 선발로 나섰고, 팀은 1-0으로 이겼다. 그는 팀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며, 커클랜드의 부상 회복 후에도 주전 자리를 지켰다. 결국 커클랜드는 2부리그인 챔피언십의 레스터 시티로 임대 갔고, 알리 알 합시는 2011-12 시즌 위건으로 완전 이적했다.
2011-12 시즌 초반 두 경기에서 알리 알 합시는 각각 1실점을 기록했다. 상대팀이 모두 승격팀(노위치 시티, 스완지 시티)이라 다소 아쉬움이 있었지만, 팀은 2무를 기록했다. 12월 22일 열린 리버풀 전에서는 ‘야신모드’가 발동하며, 수차례의 선방과 찰리 아담의 페널티킥까지 막아내어 0:0 무승부를 이끌어냈고, 골닷컴 선정 경기 최우수 선수(MOM)에 선정되었다. 이러한 활약으로 2011년 위건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하지만 이후 많은 실점을 기록하며 팀이 강등권으로 추락했는데, 이는 그의 부진보다는 수비진의 문제점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경기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33라운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홈경기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이며 프리미어리그 개편 이후 팀의 첫 맨유전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했고, 팀의 강등권 탈출에도 기여하여 다음 시즌에도 주전으로서 위건에 계속 남게 되었다.
2012-13 시즌에 팀이 강등권 가까이 빠지는 위기에 놓였을 때, 중요한 레딩 FC와의 홈경기에서 실수로 자책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다행히 위건의 고메스가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3:2로 역전승을 거두었기에 이 실수는 넘어갔다. 하지만 2012-13 시즌에 팀이 2부리그로 강등당하면서 그의 빛나는 활약도 빛을 잃었다.
그러나 이 시즌에 위건이 FA컵에서 맨체스터 시티를 1-0으로 제압하고 우승하면서, 알 합시도 생애 첫 잉글랜드 무대에서 메이저 트로피를 들어올리게 되었다.
2014년 10월 31일, 알 합시는 브라이턴 앤 호브 앨비언으로 1개월 단기 임대를 갔으나, 1경기 출전에 그쳤고 이후 소속팀으로 복귀하였다.
2014-15 시즌 종료 후 3부리그로 강등된 위건 애슬레틱 FC를 떠난 알리 알 합시는 잉글랜드 2부리그에 속해 있는 레딩 FC에서 입단 테스트를 거쳐 2년 계약을 맺고 입단했다.
레딩 FC에서 그는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비록 팀은 승격하지 못했지만, 2시즌 동안 총 91경기에 출전하며 두 시즌 연속으로 팀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이후 레스터 시티 이적설이 불거졌지만, 최종 선택은 알 힐랄이었다. 알 힐랄과 3년 계약을 맺으며 오랜만에 아시아 무대로 복귀했다.
2019년, 알 합시는 웨스트 브롬으로 이적하며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비록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지만 팀의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지켜봤고, 시즌이 끝난 후 팀을 떠났다.
그리고 2020년 8월 22일, 알리 알 합시는 현역 은퇴를 선언하며 커리어에 종지부를 찍었다.
아시아 선수로선 여전히 불모지에 가까운 골키퍼 포지션에서 두각을 드러낸 알 합시 골키퍼. 앞으로 한국 골키퍼 중에서도 언젠가 유럽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골키퍼가 나오길 기대해본다.